11월 중순에 워싱턴DC에서 있었던 G20회의에서 보호무역주의를 우려한다는 발언들이 여럿 나왔다.
오늘 보도자료가 나온 페루에서의 APEC 정상회담에서도 APEC 회원국들이 보호무역주의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선언이 나왔다.
이걸 보면서 무엇을 느끼는가?
자유무역은 절대선이 아니다. 이건 분명하다. 많은 경우 자유무역을 통해 리카디안 gains from trade를 얻을 수 있지만, 또한 상당히 많은 경우 자유무역은 한쪽의 희생을 강요하여 다른 쪽의 번영을 보장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경제상황이 좋지 않은 지금은 더욱 그러하다. 장하준 식의 관리경제 시스템이란 이러한 어려운 경제시기에 작은 규모이면서 위험에 노출된 경제들(small and vulnerable economies)에게는 유혹적이기도 하면서 그만큼 유용하기도 한 도구이다.
자기는 하고 싶지만 남들은 안했으면 하는 것. 그걸 두고 경제의 리더들은 “우려한다”라고 한다. 그렇게 20개국 정상들이 워싱턴DC에 모여서 “보호무역주의의 대두를 우려”했다. 그리고 21개 APEC 회원국 정상들이 페루에서 “보호무역을 경계”했다.
작년에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문제가 “터졌을” 때, 그게 부동산의 문제로만 끝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미국의 장기 불황, 거기서 피할 수 없는 결과인 세계 경제의 불황이 최소 2년은 지속될 것이라는 것이 경제 전문가들 중 합리적 낙관주의자들의 예측이었다.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보호무역주의로 돌아서는 것을 주저한 적이 없는 미국이다. 거기다가 전통적인 보호무역주의자들인 민주당이 행정부(대통령)와 의회(상,하원)를 장악했다. 민주당이 정권을 가져갈 것이란 것도 올해 초 정도에는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던 것. 자, 그럼 미국이 어느 정도의 강도와 속도로 보호무역주의에 시동을 걸 것이냐가 문제이다. 그리고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에 대해 quid pro quo로 대응해온 EU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우선 일응으로 미국 정부가 자동차 산업에 구제금융을 지급한다면 이를 WTO에 제소하겠다는 으름짱부터 놓고 시작한다. 흥미로울 수도 있고 당연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WTO 출범 이후 WTO 분쟁해결절차를 가장 많이 이용하고 가장 많이 제소당한 회원국은 EC와 미국이다. 이 숫자가 향후 2~3년 동안 더 빠른 속도로 늘어날 것이라고 보아도 될까?
나는 작년 말쯤부터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발생한 때서부터 WTO 체제가 앞으로 다가올 경제 불황(내지 공황)을 버티고 살아남을 것인지에 대해 궁금해 하기 시작했고, 내 스스로를 상대로 betting을 했다. 나를 상대로 내기를 건 것이니까 이겨도 그만 져도 그만이다. 내가 어디에 베팅을 했는지는 이 글을 읽으면 대충 짐작이 갈 터.
WTO 시스템이 전반적으로 세계 경제에 도움이 되면서 자국의 이익에도 부합한다는 생각에 회의가 들기 시작하면서 WTO 체제에 균열이 생길 것이다. 가뜩이나 지난 몇년간 타결되지 못한 DDA 협상을 두고 미국은 1국가 1표제인 WTO 시스템에 짜증을 내고 있다. (WTO의 의사결정은 다수결이 아니고 consensus에 의하지만 다수결과 consensus는 많은 경우 거의 같은 결과를 내놓는다.) 미국만 짜증을 내는 것은 아니다. 많은 국가들이 제각각의 이유 때문에 WTO 시스템에 짜증을 내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짜증스런 시스템에 구심력을 제공하는 국가가 아이러니컬하게도 짜증내고 있는 미국이며, 미국의 막강한 리더십이 없이는 WTO 시스템의 존속은 의문시된다.
최근 들어 소리소문 없이 DDA 협상을 진전시키려는 노력이 제네바에서 진행되고 있다. 농업 협정과 NAMA (비농산물)에서 잠정 합의안이 마련되었고 이의 타결을 위해 Pascal Lamy와 WTO 직원들이 열심히 뛰고 있다. 회원국들이 뛰는 것이 아니고 Pascal Lamy와 WTO 직원들이. DDA 협상의 진전 가능성에 회원국들은 회의적인 반면, Pascal Lamy와 WTO 직원들은 열심이라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것도 연내 타결을 목표로… 내년에 다시 DDA를 열면 안 되나? 지금 같은 어지러운 시국에 DDA 협상이 진행되기도 어려울 것 같은데.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원을 그리고 빙빙 돌다가 사람 수보다 적은 의자에 먼저 앉는 사람은 살아남고 의자를 차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죽는 게임.
WTO가 경제대국이 아닌 대부분의 그저그런 나라들에게 준 혜택은 광범위한 관세 인하. 그로 인해 내놓아야 했던 것은 서비스, 투자, 지적재산권 등에서 정책적 자율성의 상당 부분 포기. 이러한 trade off의 균형이 더 이상 안 맞는다고 느껴질 때가 삐그덕하는 시점이 되겠지.
이런 상황에서 FTA가 우리나라에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FTA라고 말하면 흔히들 한-미 FTA만 생각하는데, 지금 막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한-EU FTA도 협상 진행 중이다. Free Trade Agreement라고 하니까 자유무역협정이라 번역되고 그래서 양국간의 무역이 자유화되고 등등 그런 이미지가 자동으로 떠오르는데, 한-미 FTA나 한-EU FTA나 관세협정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포괄적 FTA (comprehensive FTA)이고 여기에는 당사국의 정책적 자율성에 제한을 가하는 조항들이 들어 있다. 이런 조항들은 NAFTA의 역사적 경험에서 봤듯이 강대국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약소국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처럼 약한 나라는 포괄적 FTA를 맺기보다 관세협정 정도만으로 구성된 FTA를 맺는 것이 낫다. 이런 FTA는 일본이 Economic Partnership Agreement라는 이름으로 주로 추진하며 중국의 FTA 기조도 관세협정이다.
게다가 미국 민주당은 우리 시각으로 봤을 때 상당히 불균형한 한-미 FTA를 자기네들에게 불리하다며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는가? EU는 항상 미국만큼은 받아내야겠다는 나라로서, 한-미 FTA 재협상이 될 경우 거기서 자기들이 받아내고 싶은 것만큼에 대해서는 재협상을 하자고 요구할 가능성도 있다. 상황이 이런데 국회는 빨리 한-미 FTA를 비준해야 한다고 서두르고 있다. 만약 국회에서 한-미 FTA를 비준했는데 미국에서 재협상을 요구하면? 그걸 거절할 수 있는 한국이 아니다. 그리고 EU의 재협상 요구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할까?
수출 중심의 경제인 우리나라는 전세계가 보호무역주의로 회귀할 경우 무역수지 악화와 그로인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FTA가 대안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주저리주저리 하는 것을 대충 정리하면, 미국이 보호무역주의로 방향을 선회한다면 그에 맞서 보호무역주의의 재현을 막을 만한 국가는 없을 것이다. 단, 미국이 현재의 불황을 차세대 버블로 유연하게 전환해가고 그에 걸리는 기간이 길지 않다면 보호무역주의는 잠시 모습을 보였다가 다시 추스러들겠지.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힘든 미래에 대한 나의 잡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