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물의 고착 요건

장기하와 얼굴들“이란 밴드의 공연을 보았다.

EBS Space 공감에서 공연한 실황물이다. EBS Space 공감은 그 공연장이 아주 훌륭한 소극장이고 음향 설비도 좋아서 좋아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일요일이면 녹화한 공연실황을 텔레비젼으로 방영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거나 운이 없어서 표를 받지 못한 경우에 다시 보기도 좋다. 인터넷 다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인터넷 다시보기는 Active X를 깔아야만 볼 수 있게 되어 있고 그 Active X 프로그램이 좀 조악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만 좀 개선해주면 완벽하다.

장기하를 보다가 누군가랑 아주 흡사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누구냐 하면 Talking HeadsDavid Byrne이다.

Talking Heads라 하면, 1980년대 미국을 휩쓴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심지어 Radiohead가 밴드 이름을 지을 때 Talking Head의 노래 “Radio Head”를 그대로 따서 지었을 정도로 후배 뮤지션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밴드이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밴드이기도 하고.

장기하와 David Byrne의 공통점이라면 (1) 똘끼, (2) 무대 매너, (3) 머리 속에서 갓 구워나온 것 같은 인생밀착형 가사. 세 가지나 공통점이 있으니 아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장기하가 David Byrne 정도로 성공하길 기다려 본다.

여기까지 쓰면 심심한 거고, 사실 말하려던 건 저작물의 고착요건에 대해 쓰려고 한 거다.

“장기하와 얼굴들” 공연이 만약에 EBS 스페이스에서 녹화해서 방영한 게 아니고, 아무도 공식적으로는 녹화를 하지 않았다고 하자. 애시당초 녹화할 생각이 없었던 공연이었다고 해보자는 거지.

그런데, 웬 장기하의 팬이 HD급 캠코더를 공연장에 들고 들어와서 공연을 녹화를 했다고 해보자. 녹화의 다음 단계는? 컴퓨터에 옮겨놓고 인터넷에 올리기 좋은 포맷으로 변경하는 것이다. 요즘은 동영상 편집 성능 가지고 CPU 우열을 따진다며? 암튼, 초고속 Q9600 쿼드코어 CPU로 동영상은 따끈따끈 편집되어서 판도라, 엠엔캐스트, 유튜브로 올려졌다고 하자. 심지어 이걸 돈 받고 팔았다고 가정해보자. (문제를 좀더 간단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럼 이 디지털기기로 중무장한 장기하의 팬은 장기하의 저작권을 침해한 것인가? 라는 질문을 누군가가 할 것 같다.

음, 한국법에 따르면 “그렇다”가 답이다.

미국법에 따르면 “연방법에서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주법에서는 그럴 것 같다“가 정답이다.

그 이유는 미국법과 한국법(및 대부분 국가의 법)에서 저작물의 성립요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저작물이 물리적인 매체에 고착(fixation)되어야 한다는 요건을 미국 연방 저작권법이 갖고 있는 반면, 한국법 및 대부분의 국가의 저작권법은 이러한 “고착” 요건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애시당초 장기하는 그 공연을 녹화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공연을 했다. 그래서 그의 공연은 아무런 매체에 “고착”되지 않았다. 적어도 장기하가 지시하거나 허락한 사람이 녹화한 것은 없었다. 즉 “고착”된 것이 없기 때문에 애시당초 저작물(work of authorship)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저작권을 논의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 즉, 미국 연방 저작권법 하에서는 장기하는 자신의 팬이 공연을 녹화하여 인터넷에 올리는 행위를 금지할 수 없다. 이게 보통 사람들이 잘 납득하기 힘들어하는 결론이다.

단, 미국 주법(state copyright law)에서는 “고착” 요건 없이 저작권을 보호해주는 것이 대세이다. (자세한 논의는 Nimmer on Copyright를 읽어볼 것) 즉, 미국 연방 저작권법에서 보호해주지 않는 ‘고착되지 않은 창작적 행위’를 주법에서 보호해준다는 것이다.

한국법 및 대부분 국가의 저작권법은 이러한 “고착” 요건이 없다. 고착되지 않더라도 말을 한다거나 공연을 한다거나 하기만 하더라도 저작물이 발생하며 저작권이 생긴다. 그러므로 장기하는 자신의 팬이 공연을 녹화하여 인터넷에 올리는 행위를 금지할 수 있다.

그럼 당연히 이런 질문이 나오겠지.

그럼 내 친구가 옆에서 한 말을 똑같이 따라 하면 저작권 침해겠네요?”

당근 그렇지 않지. 정말 진지하게 모르고 질문한 거라면 답변하겠지만, 이건 다 아는 것이겠지?

이러한 “고착”요건에 대해서 오승종이 쓴 저작권법을 보면 두 가지 법체계의 차이는 결국 입증 책임의 차이를 낳을 뿐 실무상 본질적인 차이는 낳지 않는다라든가 하는 말로 정리하고 있다. 법 공부, 특히 증거법(law of evidence)을 공부한 사람이면 그 의미를 알 것이다. 근데 파고 들어가면 이 “고착” 요건은 좀더 큰 차이를 낳기도 한다.

정말 실무적인 관점에서 얘기하면, 이 두 법체계는 아무런 차이를 낳지 않는다.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저작물이란 상업적 가치가 있는 저작물을 말한다. 여기서 ‘보호할 만한 가치’라는 건 폭넓은 개념이 아니고 정말 저작권법 때문에 변호사를 찾는 사람들이 보기에 보호할 만한 가치라는 것이고 그건 간단히 말해 돈 되는 저작물이다. 그리고 돈 되는 저작물 중은 다 충분히 이른 시간에 고착된다. 그래서 실무상으로 ‘고착’되었냐 가지고 싸우는 일은 그닥 발생하지 않는다. 특히 미국법에서는 사실 학문적인 논의의 대상 정도일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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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houghts on “저작물의 고착 요건

  1. kabbala says:

    아 그래서 미국에서는 bootleg이 나오기도 하는 건가요?

  2. danew says:

    이번 포스팅도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

  3. iplawyer says:

    kabbala/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bootleg은 법의 눈을 피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법이 있다 하더라도 하겠지요?

    2007년에 Anti-bootlegging statute가 도입되면서 연주자의 실연을 허락없이 녹화하는 행위는 금지되게 되었습니다. 근데 그 법은 저작권법 상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 형법에 만들어집니다.

    이 법이 만들어질 때 논란이 많았지요. 미국의 저작권법은 연방 헌법 상에서 ‘writing’을 보호한다는 조항에 바탕한 것이기 때문에 고착 요건을 없애는 것이 꽤 어려운데, 그걸 형법에다가 넣어버리는 걸로 피해버린 것이지요. 다음에 그거에 대해 조금 써볼까 합니다. (시간이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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