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북한주민에 의한 남한주민 상대 소송

일전에 이 블로그로 정착하기 전에 잠시 거쳤던 http://iplawyer.blogsome.com/ 에 벽초 홍명희 선생의 손자인 홍석중씨가 자신의 소설 ‘황진이’가 자신의 허락없이 남한의 현대문학이라는 잡지에 실린 것에 대해 저작권 침해 행위로 고소를 한 사건을 소개한 글이 있다. 홍명희 선생도 북한에서 살다 죽었고, 홍석중씨는 지금 북한에서 살고 있다 한다.

그 글을 쓸 당시에는 이 사건이 북한 주민이 남한의 법원을 통해 소송을 제기하는 첫번째 사건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http://danew.net/ 의 이정헌님이 답글과 이메일로 더 오래된 사건을 소개해주셨다. 그 이메일의 내용을 공개한다. 이 이메일의 내용은 영문으로 요약하여 이 블로그에 올릴 예정이다.

배금자 변호사의 책에 대한 저작권 침해 가능성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가 비상업적이고 공공의 목적으로 이용된다고 스스로 생각하므로 ‘공정 이용’ (fair use) 예외에 속할 것이라 믿는다.

배금자 변호사는 실제로 가능한 일이며 사람들의 선입관이 이 일을 어렵게 느끼게 하는 거라고 말하지만, 글을 읽어본 나는 굉장히 어려운 일들을 겪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한국의 가정법을 잘 모르는 내가 깊게 코멘트 할 일은 아닌데, 미국의 가정법(워싱턴주나 캘리포니아주법에 따르면)에 따르면 사실 관계도 그닥 간단한 내용은 아니다. 소송관계인들이 모두 남한에 있었어도 간단한 사건은 아니었을텐데 북한주민이 남한의 재산을 두고 소송을 제기했으니 복잡함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글이 길어서 blockquote 대신 아래 위 경계선만 긋는 것으로 인용부호를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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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배금자 변호사가 맡은 소송이 이 문제로는 최초의 소송인 것 같습니다.
http://find.joins.com/search_result_news02.asp?query=북한주민%20소송%20배금자

위의 뉴스에서 사안의 경과를 파악하시는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최근 발간된 배금자 변호사의 신간 “법보다 사람이 먼저다”에 이 사례가 실려 있었습니다.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317359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여 책을 구입하였으나 그것을 어떻게 전해드릴까 고민하였습니다. 결국, 부적절한 방법이지만, 전문을 보내드리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하여 이렇게 블로그가 아닌 메일을 통하여 드리게 되었습니다.

아래의 내용이 책의 169~179페이지에 실려 있는 부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이정헌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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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사람들이 남한 법정에 낸 소송

북 한 사람이 남한 사람을 상대로 남한 법정에서 소송을 제기한다? 이런 얘기를 듣는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그런 소송이 정말 가능한 것입니까?”라고 물으며 의아해할 것이다. 이미 반백년이 훌쩍 지나버린 남북의 분단 상황이 그간 사람들의 생각을 이토록 고정시켜놓은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법적으로 북한 주민들도 그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당연히 남한 법정에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2001년 6월, 나는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에 사는 북한 주민들 세 명을 대리하여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를 상대로 서울가정법원에 인지 청구의 소를 제기하였다. 2000년에 사망한 손아무개 씨의 유산에 대해 생전 손씨의 소원대로 북한의 이산가족에게도 상속권을 확보해주기 위한 소송이었다.
남북 분단 이후 북한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남한의 변호사에게 소송을 위임하여 자신들의 신분상, 재산상 법적인 권리를 찾기 위한 소송을 제기한 것은 이 사건이 처음이었다.

내가 이 사건을 맡게 된 것은 남한에 살던 손씨(소송 제기 무렵 사망하였음)의 장남 부부가 찾아와서 북한에 현재 생존해 있는 친어머니 장씨와 형제자매 세 명이 남한에 있는 부친 손씨의 법적인 상속권자로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소송을 의뢰해왔기 때문이다.

손씨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 봉남리에서 장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들은 당시 시행중이던 조선호적령에 의해 일제강점기의 호적에 혼인신고를 함으로써 법률상 부부가 되었고, 슬하에 아들 넷, 딸 둘을 두었다.

손씨는 1946년 부모를 황해도 집에 남겨놓고 처자식만 데리고 서울로 이사해 종로구 충신동에 집을 마련했다. 이곳에서 사업을 하면서 자식들을 서울에서 공부시켰으며 황해도의 부모 집과 서울 집을 왕래하며 지냈다.
1950 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손씨는 처자식과 함께 북한으로 넘어가 부모님이 계신 황해도 고향집에서 같이 살다가, 1952년에 손씨만 단신으로 먼저 남한에 왔다. 남은 가족들은 황해도의 교동을 통해 배를 타고 남하하던 중 인민군에 발각되었다. 그 와중에 셋째 아들은 죽고, 장남과 4남은 탈출하여 남하에 성공했으나, 나머지 가족들은 인민군에 의해 북한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안타깝게도 손씨 가족은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손씨의 아내인 장씨와 차남, 딸 두 명, 손씨의 부모는 북한 황해도에서 살게 되었고, 손씨는 장남, 넷째 아들과 함께 서울에서 살게 된 것이다.

6.25전쟁 때 생이별한 북한의 처자식

휴 전으로 38선에 철조망이 쳐지고 분단이 고착화되자 손씨는 북녘에 있는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눈물짓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아야 했기에 서울에서 이씨 여인을 만나 함께 살게 되었고 두 명의 자식을 더 낳았다.

1959년 미군정 법령에 의해 38선 이북에 호적을 가진 월남 동포들의 가호적제도가 만들어질 때, 손씨는 행여 연좌제의 불이익이 있을까 염려하여 북한에 있는 처와 자식들을 신고하지 않고 누락해버렸다. 손씨는 남한에서 만난 이씨를 일제강점기에 이미 혼인 신고한 첫 부인인 것처럼 신고하고, 북한에서 함께 온 두 명의 아들도 이씨와의 사이에 낳은 자식인 것처럼 허위 신고했다.

손 씨는 남한에서 사업에 성공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렇지만 북한에 남기고 온 처자식 생각에 늘 가슴이 아팠고, 자기 재산을 북의 가족들에게 물려주기를 소원했다. 손씨는 1987년 자신의 농장에 북한의 아내에게 바치는 ‘불망단비不忘檀碑’를 세워놓고 그곳에 자주 머물며 한을 달랬다.
불망단비에 적힌 글을 보면 손씨가 북한의 아내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당신에게 이 글을 바치오. 꿈에도 잊을 수 없는 당신이 홀로 남아있는 고향산천이 바라보이는 이곳 산상에서 당신을 사모하면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이 불망단비를 세우고 스스로 자위하고자 하오.

…… 1950년 전란으로 인하여 불안과 비통 속에서 혼란 중에 떠난다는 인사조차 못하고 자식들과 부모님의 봉양 등 중책만을 맡기고 당신 곁을 떠나온 이 무정한 남편을 얼마나 원망하고 실망하였겠소. 떠날 때는 일시적인 피난으로 생각하고 곧 돌아올 것이라 믿었지만 그 길로 돌아가지 못하고 벌써 37년간의 세월이 흘렀소.

운명으로만 생각하기에는 참으로 괴로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밤이면 뜬눈으로 지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소. 때로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당장 당신과 부모님이 계시는 그곳으로 뛰어가고 싶은 심정으로 고민한 적도 있소.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구려.

남북통일이 하루속히 이루어져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우리 가족 모두가 만나서 단 하루만이라도 지나간 슬픔과 가슴 아팠던 일을 하소연하였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반드시 성취되기를 기원하오. ……이곳 산상에서 당신을 사모하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이 불망비를 세우니 우리 모두 만날 수 있는 그때까지 서로가 평강하게 지낼 수 있도록 기원합시다.

손씨는 북한에 있는 가족의 생사를 백방으로 탐문하던 중 1990년 중국에 사는 조선족을 통해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아내와 자식은 모두 생존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손씨는 북한의 아내 장씨가 시부모를 모시고 아이들을 키우며 평생 수절하고 살아왔음을 알고 통곡했으며, 그때부터 조선족을 통해 북한 가족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손씨는 편지를 통해 북한 가족의 비참한 생활상을 알게 되었으며 (북한의 가족은 영양실조, 폐병 등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가족을 돕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일본을 통해 북한에 있는 가족에게 돈과 물품을 계속 보냈고, 이때부터 손씨는 자기 재산의 절반을 북한 가족에게 주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

손씨는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하고 가족을 만나기를 손꼽아 기다렸으나 1999년 9월 상봉 허가가 나올 무렵 의식을 잃고 얼마 후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손씨를 대신하여 장남이 북한의 친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을 만나고 돌아왔다.

손 씨의 장남이 나에게 북한의 가족들을 위한 소송을 맡긴 것은 부친의 뜻을 받들어 손씨가 남긴 재산의 절반을 북한 가족에게 주자는 제안을 후처와 그 가족들이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한의 호적에 올라 있는 가족들만이 법정상속 지분에 따른 재산상속을 받기를 원했고, 북한 가족들은 상속권자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생전에 손씨와 후처 이씨는 사이가 좋지 않아 10년간 별거 생활을 했다고 한다.

나는 손씨 장남의 얘기를 듣고 북한의 친모와 형제자매들에게 남한의 부친이 남긴 재산에 대한 법적인 상속권을 확보해주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가족에게 유산을 상속하기 위한 007작전

북 한 가족들을 남한의 손씨 호적에 올리기 위해서는 세 가지 종류의 소송이 필요하다고 나는 판단했다. 첫째는 손씨의 호적에 법률상 처로 되어 있는 후처 이씨를 호적에서 제외하는 소송이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 가족들로부터 직접 위임장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부친 손씨의 사망으로 호주승계를 받은 장남이 원고가 되어 남한의 후처를 호적에서 제외하기 위한 혼인무효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취적허가신청이다. 이 또한 북한 가족들이 직접 원고가 되어 소송을 제기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손씨의 장남이 호주승계 자격에서 원고가 되어 북한의 가족들을 남한의 손씨 호적에 취적 허가하는 것을 선청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 러나 이 소송만으로 북한 가족들을 호적에 올리는 것을 보장할 수는 없었다. 북한의 가족들을 손씨의 호적에 올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북한에 남겨진 자식들이 직접 원고가 되어 손씨의 자식임을 인지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의 가족들로부터 위임장을 받아야만 했다.

나는 손씨의 북한 가족들이 위임인으로서 남한에 있는 변호사에게 소송을 위임하는 소송위임장을 만들어 장남에게 주었다. 손씨의 장남은 남한에 있는 이산가족상봉단체와 일본에 있는 재일교포, 이렇게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위임장을 받았는데 마치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참으로 힘겨운 과정이었다.

이산가족상봉단체의 대표는 중국에서 활동하는 연락망(북한 주민들의 소재지 탐문, 물건 전달, 탈주 등의 일을 돕는 사람)에게 위임장을 전달했고, 그 사람은 다시 북한 현지의 연락망으로 활용하고 있는 인민무력부 요원에게 위임장을 전달하였다. 인민무력부 요원이 북한의 손씨 가족을 만나 위임장에 서명날인을 하고 유전자 검사에 필요한 머리카락을 채취하여 봉투에 담아 중국으로 왔는데, 그 사이에 중국에서 활동하던 연락망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결국 다른 이산가족상봉단체 대표에게 위임장이 든 봉투가 전달되어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도착했다.

이 소송은 손씨의 사후 1년 이내에 검사를 상대로 할 수 있는 것이어서 만일 소송위임장이 1년 안에 도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위임장을 북한에 보낸 후 이것이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그야말로 가슴 졸이며 기다려야 하는 초조한 시간들이었다. 다행히 1년 안에 위임장이 도착하여 나는 바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

인지청구의 소송이 진행되던 도중에 일본에 있는 재일교포가 위임장을 받아 손씨의 장남에게 전달했고, 나는 두 번째 받은 위임장을 법원에 추가 증거로 제출했다. 재일교포는 위임장을 가지고 북한을 방문하여 손씨의 북한 가족들을 만나서 함께 사진촬영을 하고, 소송위임장에 서명날인을 받은 후 북한 가족들의 자필 편지를 동봉하여 남한에 있는 손씨의 장남에게 전달한 것이다. 손씨의 장남은 이러한 위임장을 받은 사실과 서류들을 모두 통일부에 신고하여 뒤탈이 생기는 것을 미연에 방지했다.

이 사건에서 소송위임장이 ‘사실’임이 확인되면 나머지는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북한의 가족들이 손씨의 자식이라는 것을 입증할 많은 증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 가족들은 손씨가 6.25전에 발급받은 호적등본의 사본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고, 북한 가족들과 10년간 왕래한 편지와 사진들도 있었다. 또한 손씨가 신청한 이산가족상봉 신청서에 처자식들로 기록한 문건이 있었고, 북에서 같이 남하한 손씨의 형제자매들이 증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지청구 사건에서의 쟁점은 소송위임장에 서명 날인한 사람이 실제 북한의 손씨 가족임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손씨의 후처 가족들은 피고의 보조참가 자격으로 소송에 참가해서는 위임장이 정말로 북한 가족들에 의해 작성된 것인지 알 수 없다면서 이를 문제 삼고 나왔다. 북한 인민무력부 요원으로부터 위임장을 전달받은 이산가족상봉단체 대표가 증인으로 나와 전달 경위를 증언하였지만, 피고 측은 그는 직접 위임장을 전달받은 사람이 아니므로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이로 인해 직접 위임장에 서명을 받아온 인민무력부 요원이 증인으로 출두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나는 국가정보원에 북한 인민무력부 요원이 남한의 법정에 증인으로 설 수 있도록 협조를 부탁하는 공문을 발송했다. 얼마 후 담당자들로부터 ‘협조 가능하다’는 구두회신을 받았고, 재판부에 의한 정식 증인채택이 이루어지면 국가정보원이 협조하여 중국에서 인민무력부 요원을 비밀리에 남한으로 데려와 남한 법정에서 증언하는 방법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인민무력부 요원을 증인으로 신청하자 재판부는 정치 외교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므로 법원행정처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으며, 그 사이 그 인민무력부 요원이 중국 상하이에서 1주일 머문다는 연락을 받고, 담당 재판부에 중국 베이징 소재 한국대사관에 판사가 출장을 가서 증인신문을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런데 피고 측은 다시 그 인민무력부 요원의 신분과 그 사람의 신뢰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렇게 양측이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사이 뜻밖의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다. 손씨가 사망한 후 1년이 다 되어 상속세 미납에 따른 가산세 및 가산금이 계속 증가하여 상속 재산이 소멸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결국 본처 가족과 후처 가족 간의 합의로 북한 가족들에게 줄 몫을 일부 정하고 이 사건을 취하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북한 사람들이 남한 법정에 소송을 낸 첫 번째 사례의 전말이다. 승소를 예상한 터라 판례를 남기지 못해 아쉽지만 소송 자체만으로도 그 의미가 크다고 본다.

내가 북한 주민들로부터 직접 소송위임장을 받아서 남한에서 최초로 소송을 제기하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특별한 발상이 아니다. 콜롬버스의 달걀 세우기 같은 발상이라고 할까. 그러나 내가 북한 주민들로부터 직접 위임장을 받아서 남한의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고자 했을 때, 같은 법조인들조차 “그런 소송이 가능한가?”라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찌 보면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임에도 50여 년간의 분단 상황이 우리 생각의 틀을 고정시켜놓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쉽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 사는 사람이건 한국에서 재산권과 신분권 등에 관한 법적인 권리를 가진 자는 한국의 변호사를 선임하여 한국의 법정에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물며 북한 주민은 당연히 우리 동포가 아닌가?

우리나라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고 정하여, 북한도 대한민국의 헌법과 모든 법률이 지배하는 영토로 규정하고 있다. 헌법, 법률, 혈연관계, 국제인권법 어느 모로 보더라도 북한 주민들은 그들의 신분상, 재산상 권리를 확보할 권리가 있는 셈이다.

북한 주민들이 그동안 이와 같은 권리를 행사하지 못한 것은 한반도가 분단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남한으로 왕래할 수 없었던 까닭에 그들은 제3국의 국민들보다도 더 열악한 위치에 있다. 남한 법정에 출두하기 어려운 사정을 이용하여 그 위임장의 효력에 대해 끝까지 다툰다면 북한 주민들의 권리 보장의 길은 무척이나 어려울 것이다.

북한 주민들을 위한 소송을 진행하면서 느낀 점은 망인亡人의 재산은 산 자의 것이 아니라 망인의 것이라는 것, 따라서 망인의 뜻에 따라 처분하는 것이 산자의 의무라는 것이다. 격변의 혼란기에 태어나 평생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응어리를 안고 살다간 손씨.

6.25전쟁이라는 시대적인 아픔이 없었더라면 손씨와 그의 북녘 가족들은 생이별을 하는 일도, 그렇게 헤어진 후 평생을 그리워하며 사는 일도, 손씨가 죽은 후 이렇게 ‘뼈아픈’ 소송을 벌이는 일도 결코 없었을 것이다.
평생 부지런히 일해서 많은 재산을 일군, 지금은 고인이 된 손씨가 저승에서 간절히 바라고 있을 그 뜻, 그의 재산은 그의 뜻대로 처분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마땅한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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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oughts on “최초의 북한주민에 의한 남한주민 상대 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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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좋은친구 says:

    북한관련 재미난 소송 잘 봤습니다.
    영어를 잘 못해서 영어전문은 P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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